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문단 편집) === 남아프리카 생활 ===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간디는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되었다. 이때 간디가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가 '''기차에서 짐짝과 함께 내동댕이쳐진 사건이다'''. 정당하게 티켓을 구매하였음에도 간디는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1등석에서 쫓겨난다. 당시의 1등석은 오늘날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1등석의 영국인 승객이 차장을 불러 냄새나는 쿨리랑 같이 있기 싫으니 내보내달라고 하여 차장이 간디한테 바로 나가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억지 핑계였다. 간디는 생김새만 인도인이었을 뿐 오랫동안 영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상류층의 생활에 익숙해져 복장부터가 영국식 신사 양장에 영국인에 준하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차장은 1등석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간디한테 2등석, 3등석은 자리가 없으니 짐칸으로 가라는 모욕을 주었다. 간디는 그럴 수 없다고 거부하여 차장이 기차 직원들이랑 같이 그를 기차에서 강제로 내동댕이치며 쫓아냈던 것이다. 쫓겨나는 간디를 비웃은 것은 덤이었다. 기차에서 쫓겨난 간디는 별수없이 [[역마차]]를 탔으나 여기서도 역마차의 영국인 마부가 그의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야겠으니 비켜달라고 요구하여 비켜줘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상위 카스트에서 자라나고 영국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상류계급인 간디조차도 단지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게 되자 비로소 대영제국이 겉으로만 식민지인을 같은 영국인이라고 했지, 실제로는 2등 시민으로 매우 멸시하고 차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자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로, 인도에 다녀올 때 인도인 청년들과 함께 돌아오자, 반정부 운동에 반감을 가진 남아프리카 백인들이 간디에게 [[린치]]를 행했고, 이에 남아공 경찰청장의 부인인 알렉산더 부인이 나서서 그를 보호한 사례가 있다. 변호사 개업 직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특히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에 강력히 반발하여 이러한 법률의 폐기를 주장했고 이를 위한 게릴라 시위를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당했다. 이후 출소한 간디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 입대를 자원하게 되었다. 간디는 영국군의 입대시험 및 신체검사에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나 당시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 제2차 보어전쟁은 영연방(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당시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지상군과 보어인으로 구성된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연합군 간의 전쟁이었다. 최초 2년간은 보어인들이 끈질긴 저항으로 영국군의 침공을 버텨냈으나,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해 영연방이 당시 400,000명의 보어인 인구수에 필적하는 350,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말살 작전을 펼쳤다. 결국 보어인 총 인구수의 1/4에 해당하는 100,000여 명을 사살하면서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이 때 간디와 인도인들은 의무병과 후송 임무 등을 맡았고, 가혹한 환경하에서 후송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영국군 기록에는 8,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는 사망자 및 실종자 수로 130,000명을 주장했으며, 특히 영국군 수용소에 갇힌 20,000여 명의 보어인이 종전 이전에 수용소 안에서 사망하거나, 실종하여 학살 의혹이 있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 격이 되어 각종 조직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06년 남아프리카에서 '''<아시아 등록법>'''(Asiatic Registration Act)이 통과된다. 모든 인도인에게 지문을 등록하고, 등록 서류를 항상 소지할 것을 요구하는 법이었다. 이 때, 간디는 처음으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펼쳤다. 비폭력의 원칙을 대규모의 정치적 운동에 적용한 것은 이 운동이 처음이었다. 인도인들은 지문 채취를 거부했고, 광부들은 파업했다. 7년간의 항의 끝에 <아시아 등록법>은 폐지되었다. 간디가 가장 존경하는 남아프리카인은 [[보어인]]이었던 얀 스뮈츠 수상이었다. 스뮈츠 역시 간디와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았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고, 자신의 여러 저서에도 간디를 언급한 만큼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스뮈츠가 휴머니스트이고, 남아프리카 내 인도인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크다. 스뮈츠는 또한 제1야당 남아프리카연합의 당대표였던 만큼 [[국민당(남아프리카 공화국)|국민당]]의 집권과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했다. 그래서 스뮈츠는 본인이 총리로 있었던 시절, [[아파르트헤이트]]를 완화했지만 본인 역시 인종 분리를 지지했던 한계 탓에 본격적인 완화나 폐지에는 이르지 못해 흑인들은 흑인들대로 불만스러워했고, 헤르초흐계 역시 불만을 품고 따로 정당을 차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